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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짐은 어떻게 체제화되는가

모 IT 대기업 채용 과정을 진행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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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짐은 어떻게 체제화되는가

"네 책임이 될 거야. 분장 때문에 이 사람들 생계를 위협하는 거니까. ... 고마워."

- 영화 <바빌론> 중 넬리 라로이가 흑인인 시드니 팔머의 피부가 조명 때문에 밝게 나오자 그에게 흑인 분장을 부탁하며

스타트업 컨설팅을 하기 전에 다시 취업을 할까 고민도 했었기 때문에
여러 회사들의 채용 과정을 진행했었다.

그 중 모 IT 대기업도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건방짐은 어떻게 체제화되는가' 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시간도 꽤 지났으니 글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가 건방진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나보다 건방진 것에 매우 예민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동의하기 힘들거나 기분 나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모 IT 대기업에 지원할 때, 지원서에 학점을 적는 란이 있었다.
12년 전 학점을 다시 찾아보기도 귀찮고, 이제 일한지가 10년인데 그거 보고 결정할꺼면 됐다 하는 마음으로 0점으로 적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밤 10시쯤 퇴근하는 길에 전화가 왔다. 그 기업의 인사담당자였다.
학점이 0점으로 적혀있는데, 학점을 제대로 기입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셨다.

하지만 역시 찾아보는 것이 귀찮았었고 내 학점이 3점은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기는 할 수 있는데 원래보다 더 낮게 적어도 문제가 되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괜찮다고 할 줄 알고 물어봤던 것이었다.

그런데 낮게 적는 것도 안되고 정확하게 적어야 한다고 했다.
합리적인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기업에서 갑질을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채용 과정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인사담당자분이 엄청 달래주시면서 이메일을 보낼테니 답장으로 '학점 공개를 원하지 않는다'고 적어보내주면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하셨다.

그 때 '아, 내가 이런 일로 채용 과정을 중단하면 이 분이 뭔가 난감해지는구나. 밤 10시에 퇴근도 못하고 이렇게 이상한 사람 기분 맞춰주면서 달래줘야 하다니 힘드시겠다.' 싶어서 그러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진행했다.


이후 면접 보고 마지막 단계로 인성검사를 했다.
검사지지 질문들을 보면서 결과가 이상하게 나오겠다 생각했다.

꽤 많은 질문이 자신을 잘 모르거나 알면서도 속이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구성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가끔씩 화를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1 - 전혀 그렇지 않다' 부터 '5 - 매우 그렇다' 까지

나는 스스로가 화를 참지 못하는 어떤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5 - 매우 그렇다' 를 선택했다.
화를 어떤 상황에서든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이런 식으로 나는 창의력이 부족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를 자주 내며,
화를 참지 못할 때가 있지만 자기 절제가 강한 사람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어떠한 모순도 없다.)

그리고 또 며칠 지나서 전화가 왔고, 인성검사 결과가 안좋게 나왔다고 다시 봐달라고 요청 받았다.
인성검사를 다시 봐달라니? 혹시 오류가 있었을까봐 그런가 싶어서 인성검사를 다시 진행했고 아마 거의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전화가 와서 또 다시 봐달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의 인성이란 것이 그렇게 빨리 바뀌는 것도 아닌데 다시 본다고 의미가 있을까요? 하고 물어봤다.
그래도 무조건 다시 봐달라고 요청받았다.
그 사람도 얼마나 힘들겠나 싶어서, 더 이상 별말 안하고 다시 봤고 역시 떨어졌다.


위의 과정에 내가 느낀 그 기업의 건방짐은 아래와 같다.

  • 합리적인 이유 없이 정확한 학점을 요구했다.

    • 신입에게 학점을 요구하는 것이야 뭐라도 분별을 하기 위해 그럴 수 있다 쳐도, 경력에게도 일괄적으로 학점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타당한가?
    • 지원자가 학점을 낮게 적어서 나중에 서류 제출했을 때 다른 것이 밝혀지면 입사가 취소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력 중에 프로젝트 하나 누락한 것이 있어도 입사를 취소시키는가?
  • 인성검사를 다시 보라는 것은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 것인가?

    • 먼저 오류 가능성에 대한 어떠한 확인 과정도 없었다. 내가 진행을 제 시간에 못했는지, 질문 중 이해 못하겠는 것이 있었는지 등 확인 없이 그저 다시 봐달라고 했다.
    • 오류가 아니라면 인성검사를 다시 봐서 기대할 수 있는 결과가 아래 말고 더 있는가?
      • 일관성이 부족한 사람이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
      • 자신의 답을 버리고 회사의 기준에 맞춰 통과하기를 바란다.
    • 이 중에 우리는 이래서 인성검사를 다시 봐달라고 요청합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항목이 있는가?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은 어디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 과정을 모두 진행했다는 것에 있다.

기업이 인격체가 존재하고 나에게 직접 이를 요청했다면 절대 안했을 일들이다.

직접적인 건방짐
직접적인 건방짐

하지만 기업은 약한 대리인을 내새웠다.
어쩔 수 없이 그런 건방짐을 받아달라고 요구해야하는 사람들이 중간에 껴있었고,
이는 내가 기업에 맞서서 건방지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간접적인 건방짐
간접적인 건방짐

기업은 건방짐에 성공했고, 그렇게 건방짐은 체제화되었다.


그 기업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사건은 가끔 화를 참지 못하는 일에 속했기 때문에 글이 쓸데 없이 길어졌다.)

그냥 세상에 이런 구조가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거기 끼인 인간은 그런 구조의 건방짐을 감내해야하는 일들이 발생한다는 이야기이다.